야간소아과 처방전(반쪽짜리 행정,약국공백,의료소외)

야간소아과 처방전

밤 10시에 아이 이마를 짚었을 때 그 열기를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어렵게 야간 진료를 마치고 처방전을 손에 쥐었는데, 근처 약국이 전부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병원 문을 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그날 밤 저는 차 안에서 스마트폰을 붙들고 처절하게 느꼈습니다.

처방전을 들고 헤맨 그 밤

아이가 갑자기 고열을 보인 건 밤 9시가 넘어서였습니다. 다행히 집 근처에 야간 진료를 운영하는 소아과가 있었고, 30분쯤 기다린 끝에 진료를 마쳤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오늘 밤 안에 꼭 약을 먹여야 한다"고 했을 때는 그냥 '그러면 되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나와보니 상황이 달랐습니다. 약국마다 셔터가 내려져 있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당번약국'을 검색했습니다. 당번 약국이란 약사회 에서 지정한 순번에 따라 야간이나 공휴일에도 문을 여는 약국을 뜻합니다. 지도에 표시된 곳까지 거리를 확인하니 차로 35분이었습니다. 열이 39도를 넘어 울고 있는 아이를 카시트에 앉히고 한밤중 도로를 달렸던 그 기억은, 솔직히 지금 떠올려도 가슴이 답답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당번 약국도 반드시 문을 열어야 하는 법적 강제력이 약한 편이라, 실제로 닫혀 있는 경우도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봤을 때 이건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었습니다. 아이 건강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반쪽짜리 행정이 만든 구조적 공백

강원도 영월군 사례가 뉴스로 보도됐을 때, 저는 그 내용이 남 얘기 같지 않았습니다. 군비와 국도비를 합쳐 연간 3억 원을 투입해 밤 11시까지 야간 소아과를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정작 지역 약국 17곳 중 야간에 문을 여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겁니다. 진료 후 처방전을 받아도 약을 지을 수 없는, 말 그대로 반쪽짜리 의료 서비스가 3년째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핵심 문제는 칸막이 행정입니다. 칸막이 행정이란 각 부서나 기관이 자기 영역만 독립적으로 처리하고 연계를 하지 않는 행정 구조를 뜻합니다. 병원 진료는 보건 당국 소관, 약국 운영은 약사회 소관, 그 사이에서 환자는 처방전을 든 채 밤거리를 헤매는 겁니다. 영월군이 "약사회가 어렵다고 해서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솔직히 저는 화가 났습니다. 그게 행정의 답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인근 태백시는 지자체 예산을 직접 투입해 야간 소아과 운영 시간에 맞춰 약국도 문을 열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강원도 안에서 사는 곳에 따라 밤에 아이 약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갈리는 겁니다. 이것이 제가 이 문제를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형평성 문제로 보는 이유입니다.

보건복지부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출처 : 보건복지부), 공공 심야약국 제도는 밤늦게 까지 약국을 운영하면 운영비를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강원도 전체에서 이 지원을 받은 약국이 지난해 기준 단 4곳뿐이었고, 그마저도 춘천·원주·속초·동해 같은 도시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정작 지원이 절실한 농촌 지역은 제도의 혜택 바깥에 있었던 셈입니다.

의료소외, 도시와 농촌의 격차

강원도 18개 시군 중 절반이 밤 9시면 약국 문을 닫는다는 사실은, 수치로 보면 간단해 보여도 실제로는 묵직한 현실입니다. 밤 9시 이후에 진통제 한 알 살 곳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제가 경험한 도시 근교도 그랬는데, 인재군처럼 약국이 저녁 8시 전에 닫는 곳에 사는 분들은 오죽할까 싶었습니다.

원내조제 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원내 조제란 병원 내부에서 의사가 직접 약을 조제하여 환자에게 투약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현행법상 의약분업 원칙에 따라 원칙적으로는 허용되지 않지만, 도서·벽지 등 의료 취약 지역에서는 예외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의약 분업이란 의사는 진료와 처방만 하고, 약사는 조제만 담당하도록 역할을 분리한 제도를 가리킵니다. 이 예외 조항을 심야 시간대 전반으로 확대 적용하자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약국이 없는 현실에서 환자를 보호할 최소한의 안전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보건사회 연구원의 농어촌 의료 접근성 관련 보고에 따르면(출처 :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농어촌 지역 주민일수록 야간 및 응급 의료 서비스 이용 가능성이 도시 대비 현저히 낮으며, 이는 건강 결과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통계가 아니라 실제로 아이를 안고 밤길을 달려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현실적인 대안

비판만 늘어놓으면 뭐가 달라지냐는 말도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를 보면서 현실적으로 당장 적용 가능한 방향이 뭔지 생각해봤습니다. 거창한 법 개정보다 지금 구조 안에서 먼저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약국 인센티브 구조개편 : 단순 운영비 지원을 넘어, 주취자 위협에 대비한 보안 인력 파견과 미사용 약품 폐기 손실금 보전을 패키지로 묶어 지원해야 합니다. 약사도 노동자이기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며 문을 열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의료 취약 지역 한정 원내 조제 허용 확대 : 현행 예외 조항을 심야 시간대로 확장 적용하여, 약국이 없는 지역의 야간 소아과 환자가 진료 후 바로 투약받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상비약 판매규정 유연화 : 24시간 운영 점포가 드문 농촌 지역에 한해, 일반 편의점에서도 해열제·진통제 같은 상비약을 판매할 수 있도록 법 적용 기준을 완화하는 방안이 필요합니다.

공공 심야약국 지원대상 재설계 : 현재 도시 중심으로 편중된 지원 구조를, 의료 취약 지역을 우선 순위로 재편해야 합니다. 도시에서는 대안이 있지만, 농촌에는 없습니다.

이 중에서 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보는 건 첫번째 입니다. 약사들이 손해 없이 문을 열 수 있는 구조를 먼저 만들어야, 나머지 논의도 의미가 생깁니다. 제 경험상 이건 의지보다 구조의 문제입니다. 좋은 마음이 있어도 손해가 나면 지속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니까요.

병원이 문을 열었다는 것은 절반의 성공입니다. 아이를 안고 밤새 아침을 기다리는 부모에게 필요한 건, 진료를 마쳤다는 영수증이 아니라 약 한 봉지를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환자가 약을 받아 귀가하는 순간까지를 하나의 의료 서비스로 보는 시각, 그 당연한 관점이 정책에 반영되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의료 또는 법률 조언이 아닙니다.